Vida Cotidiana

라틴어 수업

희안이 2018. 11. 1. 00:32

라틴어 수업을 시작했다.
역사 석사과정에 있는 이 수업은 당시엔 학점이 공유되어 등록하지 않아도 되었었고, 청강이라는 제도에 대해 그닥 열광하지 않던 때라 패스했었는데, 막상 박사과정을 시작하고 뒤적뒤적 하다보니 라틴어가 어찌되었건 필요하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굳이 교수들(두 사람이 나누어서 고대라틴과 중세라틴 수업을 한다. 물륜 중세가 비중이 더 높다)에게 메일을 써서 허락을 받고 어제 시작한 수업에 들어갔다.
홈페이지에서 수업시간표를 찾아 갔었으나 홈페이지와는 상관 없이 수업시간표와 장소는 바뀌어 있었고-이 석사가 좀 그렇다. 고대부터 근대까지를 다루는데 대부분 중세사 하는 애들만 들어온다. 20명 정원에 절반도 안차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역사는......얘네에게도 힘든 공부이자, 이미 먹고 살 직업은 아니라는 생각이...-, 우여곡절 끝에 어제 시작한 수업에 들어갔다.
시간이 이렇게 지나고야 생각해보니, 처음왔을 때보다 언어의 수준도 조금 더 깊어졌고(진짜?), 일상언어에 대한 인지도 조금 높아졌고(정말?), 역사나 기타 여러가지 지식적인 측면에서도 아는 게 많아져서(진심?) 요즘 다시 그 때의 수업을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데 라틴어 수업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솔직히 말하면 라틴어 수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웠다는.
학제 시스템이 달라서 스페인 애들 중 인문사회계열 공부하는 애들은 고딩 마지막 즈음에 수업과목을 선택할 때 라틴어를 미리 공부하기도 한다. 어제도 수업 시작하며 교수가 물어보는데, 한 명을 제외하고는 일단 다 고딩때 라틴어를 배웠다는 것(여기서 한 번 찌그러짐)과 라틴어를 배우지 않은 상태여도 나보다 낫다는 거(두번 찌그러짐). 어쩌겠나. 내 모국어의 뿌리는 라틴어가 아닌 것을.

작년에 혼자 라틴어를 공부해보려고 유툽을 찾아보고 블로그를 보고 책을 보고 공부를 했으나 마치 학원에서 처음 외국어를 배울 때 시작하는 문법적인 접근이었고, 문법 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아서 계속 어버버 했었다. 그래서 과연 대학의 라틴어 수업은 어떻게 진행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미 라틴어를 배운 경험이 있는 애들이라고 단정짓고 시작하는 수업이라 문법따윈 개나 줘 버렸다는 것.
사실 많은 라틴어 작품들이 이미 번역이 되우 나와있어서 굳이 라틴어를 몰라도 접근은 가능하지만, 양피지를 읽는다거나 어느 일정 시기의 공식문서를 읽으려면 라틴어가 필수일 수 밖에 없는 부분이 많다. 물론 그런 도큐먼트들도 대부분의 문서고에서 요약된 출판물을 가지고 있긴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하나하나 봐야하는 것이 많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라틴어가 필요한 것은 어찌되었건 이 나라 걸 공부하려면 필수불가결한 것이니 어쩔 수가 없다.

이 "라틴어수업"이라는 책.
아빠가 살아계실 때 마지막으로 읽던 책이다. 지난 여름 아빠 병상을 지키면서 이런 저런 얘길하다가 라틴어 얘기가 나왔는데, 그 때 아빠가 당신은 언어부분에는 참 재능이 없는 것 같다며 라틴어 수업이라는 책을 사서 읽어보고 있는데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집에 있으니 한 번 읽어보라고. 대봉투같은 것으로 싸서 늘 앉아 책을 보던 소파 옆에 두었다고.
그 얘길 듣고 집으로 와서 며칠을 뒤져도 나오지가 않다가 어느 날 동생에게 얘길 했더니 책꽂이에 꽂아 두었다며 찾아주었다.
그리고 아빠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주말이라고 아빠를 만나러 온 조카들에게 교양의 중요함을 어필하시며 이런 책도 읽어봐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책 앞에 아빠의 유언같은 이야기와 서명도, 이미 한 달 가까이 음식을 섭취할 수 없어 힘이 빠질 대로 빠져버린 손으로 쓴.

어제 첫 수업을 듣다보니 이 책이 쓰여진 방식이 이해가 되었다고나 할까. 문장을 읽어 나가고 문화와 사회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접근해 나가는 각 챕터들이 어제 수업시간 내내 본 기원전후 1세기 경의 발엔시아에 있는 금석학 문구들을 보면서 참 비슷하다 싶었다.

아빠가 떠나고 100일이 훌쩍 지나갔다. 사실 100일이 지나고 난 뒤부터는 날짜는 더 이상 계산하지 않기로 했는데 어쩌다보니 하루하루 세어가고 있지는 않지만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랄까.
지금까지 슬퍼했던 포인트와는 또 다른 포인트로 아빠를 기억하게 된다. 예를 들면 아빠랑 얘기했던 이 라틴어에 대한 얘기같은 것. 그러면서 한 편으론 아빠가 살아계셨을 때 이런 얘기들을 많이 할 수 있었다면 나는 정말 보석같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끝임없이 몰아쳐온다.

라틴어 수업을 기다리다 만난 지도교수가 라틴어는 정말 사랑스러운 언어라며 그 언어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막 얘기해줬다. 수업을 들어보고 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학부 수업에 가서 앉아있어봐야겠다.
물론, 청강생으로.